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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만나는 인문학]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MAS와 PARE 사이를 건너다

오후의 여행에 스민 생각 : 여행에서 만난 인문학 38화

  • Editor. 월간경남
  • 2026년 02월호

새벽 3시가 다가온다. 이젠 정말 멈춰야 한다. 선택을 머뭇거리는 사이 ‘다음 화’가 자동 재생되고, 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자정을 넘길 때까지만 해도 날짜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잠들지 않은 ‘오늘’에 살고 있었고, 내일의 피로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1시가 지나고 2시를 지나, 3시가 가까워질 무렵 몽롱하던 감각이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일은 오늘이 되었고, 내일의 피로가 아닌, 세 시간 뒤로 닥친 오늘의 일과가 넘지 못할 산처럼 코앞에 서 있었다.

 

멈춰. 더 가고 싶으니 이제는 멈춰야 할 때.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선이다
멈춰. 더 가고 싶으니 이제는 멈춰야 할 때.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선이다

 

나에게 시간은 직선이 아닌 선분

‘즐거움엔 끝이 없다’라고 떠드는 방송국의 슬로건을 덥석 물어버린 나의 무절제함은 어리석음에 가깝다. 즐거움은 직선처럼 끝이 없이 뻗어갈 수 있고, 시간 또한 직선이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쉽게도 선분이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즐거움은 달콤함이 아니라 쓴맛이 된다. 새벽 모임에서 산길을 걷는데도 눈꺼풀이 무겁다. 쓴맛은 혀가 아니라 움직여야 할 몸에 남아 즐거움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즐거움은 끝이 없다’라는 슬로건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버찌가 아니라, 욕망을 채우려다 자신의 존재마저 먹어버리는 그리스 신화의 에리직톤(Erysichton)과 배는 산처럼 큰데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좁아 늘 갈망상태에서 허덕이는 아귀(餓鬼)이다. 
아무리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배고픔과 아무리 들이켜도 가시지 않는 갈증과 밤을 새워 즐겨도 끝이 없는 즐거움은 닮았다.

자연의 시간은 직선, 인간의 시간은 선분이다
자연의 시간은 직선, 인간의 시간은 선분이다

조르바는 절제와 금욕으로 욕망을 다스리지 않는다. 욕망의 멱살을 잡고 구역질이 날 때까지 끝장을 본 뒤 비로소 구원받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악마를 이기려면 자기가 악마 한 마리 반은 되어야 한다는 조르바도 어쩌면 ‘즐거움’이라는 욕망과의 맞짱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즐거움은 버찌처럼 한 소쿠리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욕망을 통제하려는 오만함

스물이 채 되지 않았을 때쯤으로 기억된다. 조르바가 콧방귀를 뀔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드라마가 절정에 이르러 가장 재미있을 때,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드라마에 끌려가는 느낌이 싫었고, 무엇보다 최고의 순간에 스스로 돌아설 수 있는 내가 대견했다. ‘그게 무엇이든 마음먹은 순간 끊어낼 수 있다’라는 오만함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절제가 아니라 통제에 대한 욕망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또 어떤 날에는, 일주일에 두 번 방영하는 드라마가 감질나,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단숨에 볼 수는 없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욕망을 통제하는 나’와 ‘욕망에 끌려다니는 나’가 내 속에 동시에 공존했다. 그런데도 나는 오래도록 내가 욕망에 끌려가지 않는 사람에 더 가깝다고 믿었었다. 새벽 세 시, 자동 재생되는 ‘다음 화’를 보며 뻑뻑해진 눈을 깜박거리자, 나에 대한 믿음에도 빨간불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인류, 여성 루시의 모형이다. 욕망의 시작이다
최초의 인류, 여성 루시의 모형이다. 욕망의 시작이다

 

더 높이를 외치던 미끄럼틀이 하늘에 닿을 듯하다. 동네 미끄럼틀 중 최고 인듯. 볼리비아 놀이터
더 높이를 외치던 미끄럼틀이 하늘에 닿을 듯하다. 동네 미끄럼틀 중 최고 인듯. 볼리비아 놀이터
혼자 놀아도 신나요
혼자 놀아도 신나요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들

얼마 전 편식이 심한 딸의 이야기를 들은 언니가 말했다. “안 먹는 반찬이 있으면 그 반찬만 계속해 줘. 그다음부터는 편식을 안 해.” 

욕망을 다스리는 조르바의 방법인 듯하지만, 결과는 조르바와 사뭇 다르다. 먹고 싶던 버찌를 구역질이 날 때까지 목구멍에 밀어 넣어 더 이상 버찌를 먹고 싶지 않게 된 조르바와 먹기 싫은 반찬을 어쩔 수 없이 질릴 때까지 먹은 뒤, 비로소 모든 반찬을 골고루 먹게 된 조카. 이 둘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조르바의 먹으려는 욕망과 조카의 먹지 않으려는 욕망은 출발점은 같으나, 그 욕망을 다스려지는 과정은 확연히 다르다. 
조르바는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나, 조카는 자신의 욕망이 타인에 의해 조정당한다. 
언니는 음식에 대한 조카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았으나, 대신, 취향이 고정되는 것을 막았다. 
조르바는 욕망을 태워 죽이려 했고, 언니는 욕망을 굶겨 약하게 만들려 했다. 욕망을 죽이면 공허하고 욕망을 약하게 만들면 삶의 색이 옅어진다. 그래서 욕망을 없애는 데 성공한 사람은 해탈에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로 삶을 소진할지도 모른다.

 

달의 피라미드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 피라미드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달의 피라미드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 피라미드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욕망은 다시 우리 삶 속으로

그렇다면, 추구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태워버리는 조르바와 거부의 욕망을 반복 속에 담가 물처럼 흐리게 만드는 언니의 시도는 성공했을까. 욕망은 불 속에서 타 재로 남고, 물속으로 가라앉아 돌처럼 단단해졌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바람결에 날아온 재에 눈이 찔리고, 파도에 쓸려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욕망은 그렇게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그 둘 중 누구의 방식에도 완전히 동의하지 못한 채, 여전히 ‘다음 화’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망설임을 되짚다 보면, 욕망을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과 마주하거나, 슬프게도 욕망의 부재와 만나기도 한다. 욕망이 올라오는 찰나를 놓치기도 하고, 때로는 욕망이 행동보다 반 박자 느리게 의식 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설령 욕망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것을 불태울 만큼 대담하지도, 무디게 만들 만큼 담담하지도 못하다. 어설픈 열정과 섣부른 냉정 사이에서, 나는 그저 ‘아’ 하고 탄식만 뱉을 뿐이다.

 

더 크게, 더 높이. 피라미드는 인간의 욕망의 상징인 듯
더 크게, 더 높이. 피라미드는 인간의 욕망의 상징인 듯

 

욕망의 경계선 사이를 걷는 나

스무 살의 나는 조르바를 꿈꾸었다. 물레를 돌리다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제 새끼손가락을 도끼로 내리치는 그를 보며 전율했다. 정말 손가락을 자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버찌 한 소쿠리쯤은 기세 좋게 비워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때 난, 고작 스무 살이었다.

어느새 쉰을 훌쩍 넘긴 나는 문득 묻게 된다. 나는 무엇 하나를 질릴 때까지 해본 적이 있었나.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실컷 해본 일이 있었나.
드라마를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멈추지 않고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케이블 TV에서 하루 종일 드라마가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는 순간, 쾌락이 통제를 벗어난 것만 같아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버찌 한 소쿠리는커녕, 한 접시도 끝내 먹어내지 못했다. 
결국, 난 조르바가 되지 못했다. 

그는 불꽃처럼 타올라 재가 되었지만, 나는 잔불을 머금은 채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손가락을 자르는 대신 뻑뻑한 눈을 비비며 다시 일상을 정돈하고, 적당한 죄책감을 느끼며 유혹과 타협한다. 어쩌면 ‘적당한 망설임’이 내가 택한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욕망에 완전히 잡아먹히지도, 그렇다고 욕망을 완전히 거세하지도 못한 채 그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나.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지
어느 길로 가야 하나.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지
더 빨리 달리고 싶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다
더 빨리 달리고 싶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다


나는 여전히 조르바를 꿈꾼다

문득 과거 여행길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겹쳐진다. 볼리비아 시골 마을의 낡은 벽에 거칠게 쓰여 있는 ‘MAS(더 많이)’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굳게 닫혔던 아르헨티나 국경의 ‘PARE(멈춤)’ 표지판. 이 두 단어는 마치 매일 밤 내 안에서 충돌하는 ‘조금 더 즐기고 싶은 갈망’과 ‘이제는 멈춰야 한다는 자각’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인생은 결국 끊임없이 ‘MAS’를 갈구하다가도, 어느 지점에서는 스스로 ‘PARE’를 선언해야 하는 끝없는 국경 넘기인지도 모른다. 

또다시 새벽 3시다. 세 시간 뒤의 일과는 오늘도 산처럼 내 앞에 버티고 있고,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산을 넘어야 한다. 

오늘도 그 산을 넘으며 ‘MAS’의 유혹과 ‘PARE’의 자각 사이에서 얼마나 비겁하고 오만할지. 

비록 조르바처럼 완전히 불타오르지는 못했으나, 나는 여전히 이 미완의 선분 위에서 조르바를 꿈꾼다.

파나마 운하를 바라보는 모녀. 인간의 욕망이 땅을 동강 내어 바다를 만들었다
파나마 운하를 바라보는 모녀. 인간의 욕망이 땅을 동강 내어 바다를 만들었다
MAS, 더 많이, 더많이
MAS, 더 많이, 더많이

글·사진 강주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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