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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하와이서 찾은 마산방어전투의 흔적 (2)

죽을 줄 알면서도… 참혹한 전장 누비며 자유를 지켜냈다

  • Editor. 월간경남
  • 2026년 02월호

신문으로 접한 6·25전쟁
친구 전사 소식에 충격받고
17세 때 부모 설득해 한국행
수색중대 소총수로 참전

1950년 겨울 전투·후퇴 반복
영하 40도 추위와 뒤엉킨
전우와 중공군의 죽음 생생

20년 군생활, 주한미군 근무도
2005년 한국 정부 초청 방한
“경제대국 한국 자랑스러워
우리 희생 헛되지 않아 보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참전했다.”

미 25사단 출신 6·25전쟁 참전용사 에이스 칼레오하노(91)씨는 전쟁이 두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름조차 모르던 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그의 용기를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는 고령으로 몸이 약해져 이제 시력조차 잃었다.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들의 역사는 잊힐 뻔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취재진도 가족들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1951년 겨울 한강 근처에서 찍은 사진. 왼쪽 기관총을 든 군인이 칼레오하노씨이다
1951년 겨울 한강 근처에서 찍은 사진. 왼쪽 기관총을 든 군인이 칼레오하노씨이다

 

친구 구하러 포화 속으로

하와이 원주민 출신인 칼레오하노씨는 평화로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신문을 통해 소식을 접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전쟁이 자신의 삶을 바꿀 줄은 몰랐다.

칼레오하노씨가 1950년 11월, 겨울 강추위 속에서 중공군과 전투했던 당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칼레오하노씨가 1950년 11월, 겨울 강추위 속에서 중공군과 전투했던 당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전쟁 발발 직후 그의 친구들과 졸업한 선배들은 입대해 한국으로 떠났다. 얼마 뒤 그들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크게 다쳤다. 칼레오하노씨는 친구들이 전장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신도 함께 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17세였던 그는 입대하려면 부모님 동의가 필요했다. 부모님은 “한국에 가면 네가 죽을 수도 있다”며 말렸다. 
그는 “알고 있다. 그래도 친구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며 설득했다. 부모는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결국 서명해 줬다. 그의 어머니는 하루 종일 울었다.

그는 오른쪽 팔에 ‘ACE(에이스)’라고 적힌 문신이 있다. 함께 참전한 친한 친구가 ‘꼭 살아오라’며 그의 이름을 팔에 직접 새긴 것이다. 그도 친구의 팔에 문신을 새기면서 무사 생환을 기원했다.

칼레오하노씨의 오른쪽 팔에는 입대 전 친구가 “꼭 살아 돌아오라”는 다짐을 담아 새겨 준 문신이 있다
칼레오하노씨의 오른쪽 팔에는 입대 전 친구가 “꼭 살아 돌아오라”는 다짐을 담아 새겨 준 문신이 있다

“친구 47명이 같이 입대해 한국에 갔어요. 얼마 되지 않아 5명이 전사했고, 9명은 크게 다쳤죠. 한 친구는 포로가 돼 3년 동안 북에 있다가 끝내 전사했어요. 저에게 문신을 새겨 준 친구도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사했습니다.”

 

배대균 회장이 칼레오하노씨와 코바야시씨에게 창원특례시 등에서 준비한 감사의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배대균 회장이 칼레오하노씨와 코바야시씨에게 창원특례시 등에서 준비한 감사의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적, ‘추위’와 싸운 그들

1950년 10월 수색중대 소총수로 참전한 그는 일본을 거쳐 11월 한국 김포에 도착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추위를 느꼈다. 따뜻한 하와이 날씨와 달리 매섭게 추웠다. 하와이에서 온 병사들은 겨울 피복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고, 혹한 속에서 무기가 얼어 불발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따뜻한 음식을 먹은 날은 손에 꼽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주력부대 앞에서 길을 열고 적 동향을 확인했으며, 때로는 철수로(퇴로·退路)를 지키기도 했다.
미군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믿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고, 인민군도 계속 후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에는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0월 중순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그 믿음은 깨졌다.

그는 11월 중공군의 2차 공세를 잊을 수 없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듯 그의 말은 떨리기 시작했다. 전투와 후퇴가 반복됐다. 

“이름 없는 전투를 수없이 치렀습니다. 빠르게 공격한 뒤 다시 후퇴했습니다. 수색중대였기에 적을 계속 찾아다녀야 했죠.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M1 소총을 중공군을 향해 쐈는데, 그 많은 숫자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7세 하와이 청년에게 전쟁은 추위와 시체가 뒤엉킨 풍경으로 남았다. 1950년 겨울, 그가 주둔했던 한반도 북부 지역은 영하 20~40℃까지 내려갔다.

그는 한국의 날씨를 “잔인했다”고 기억할 정도였다. 이동 중 동상에 걸려 숨진 미군도 많았다고 그는 증언했다. 단순한 부상도 추위 때문에 치명상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되뇌었다고 한다.

어느 날에는 마을을 점령한 뒤 주변을 살피던 중, 후퇴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있던 중공군 두 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발목 아래가 동상에 걸린 상태였다. 그는 가솔린을 다리에 뿌려 응급처치를 해 목숨을 살렸다고 했다. 아군과 적군 모두를 떨게 한 강추위였다. 

또 다른 날에는 두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논밭에서 얼어 죽어 있는 것을 봤다. 땅을 파서 묻어주려 했지만, 땅이 꽁꽁 얼어 그러지도 못했다. 그에게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

“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물어봐요. 어느 전투가 더 힘들었냐고. 6·25전쟁은 보이지 않는 ‘추위’라는 적과 싸워야 했습니다. 

동사한 전우들을 수없이 많이 봤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로 찍은 것처럼 기억이 선명해요. 가슴이 아픕니다.”

 

미 전투일지가 이어준 ‘특별한 인연’… “전쟁기념관으로 역사 증언”
미 전투일지가 이어준 ‘특별한 인연’… “전쟁기념관으로 역사 증언”

 

자유를 지킨 미군들, 잊히지 않기를

칼레오하노씨는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1952년 9월 하와이로 돌아왔다. 이후 20년 동안 군 생활을 했는데, 1954년부터는 한국에서 세 차례 주한미군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태권도를 배워 제대 후 버지니아주에서 태권도 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2005년 한국 정부 초청으로 방한했다. 전쟁 당시 한강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강이었지만,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다. 경제대국이 된 한국이 자랑스럽다며 엄지를 세웠다.

칼레오하노씨의 태권도 관장 시절 모습
칼레오하노씨의 태권도 관장 시절 모습

“한강에 다리가 여러 개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한강 도하 작전에 참여했는데, 그때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거든요. 자유가 없는 북한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해요. 자유를 찾기 위한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코바야시, 코바야시”라고 말하며 전우를 찾았다. 기획 상편에 소개된 코바야시씨와 그는 같은 요양원에 머물고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 꺼내야 했던 두 영웅은 뜨겁게 손을 맞잡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칼레오하노씨의 어깨를 전우가 두드렸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당신은 존중받아야 할 존재이며 영웅입니다. “사라지지 마세요.” 우리 마음과 기억 속에서.

 

미 25사단 참전용사인 칼레오하노씨(왼쪽)와 코바야시씨
미 25사단 참전용사인 칼레오하노씨(왼쪽)와 코바야시씨

 

[특별기고] 미 전투일지가 이어준 ‘특별한 인연’… “전쟁기념관으로 역사 증언”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장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장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장

지난 2025년 11월 25일 하와이에서 허브 코바야시(94)와 에이스 칼레오하노(91)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하와이에 본부를 둔 미25사단 전투요원으로 6·25전쟁을 치렀다. 코바야시는 통신중대원으로 마산전투 때부터, 칼레오하노는 수색중대원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합류했다.

훈장을 단 두 전사는 요양원에서 우리 일행(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경남신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바야시는 전쟁이 난 그해 8월 초(추정 8월 3일) 다른 통신병과 함께 부산에 상륙해 곧장 마산 서쪽 10마일 지점(당시 마산시 진동면)으로 이동, 미27연대를 지원했다. 통신 차량(‘스리쿼터’)을 몰며 초단파 송수신을 맡던 그는 작전 3일째, 차량 뒷문을 열려던 순간 옆에 있던 동료가 갑자기 쓰러져 얼굴에서 피를 쏟는 장면을 목격했다. 인근 매복 저격수의 총탄이었다. 같은 하와이 출신에 통신교육을 함께 받은 동기생, 깊은 우정을 나눈 전우였다. “전투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의 충격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코바야시는 발작적으로 불안과 우울이 밀려오는 전쟁상처증후군에 시달렸고, 무표정은 전역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공부할 때도, 긴 세월 대학에서 생태학 교수로 지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Korea’라는 이름조차 꺼내기 싫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하와이까지 찾아온 뒤에야 마침내 전우의 죽음을 입 밖에 냈다. 점심을 함께했지만 그는 말수가 거의 없었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내가 대신 움직였어야 했다”는 자책이 끝내 남았다. 두 사람이 통신차량 뒷문 쪽에 서 있었고, 오른쪽의 전우가 가만히 서 있다가 저격을 맞았다는 기억이 그를 옭아맸다.

두 전사는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해 중국 땅을 바라봤고, 1950년 겨울 중공군 2차 공세로 서울 쪽으로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민가에서 ‘살려달라’고 흐느끼던 어린 중공군을 만났다는 기억도 전했다. 동상에 걸린 소년이었다. 미군 역시 동상으로 고통받던 때라, 전선의 잔혹함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6·25전쟁 중 마산방어전투는 잊힌 전투였다. 노인 세대들은 지난날의 전투를 잊었으며 중년 그 이하 시민들은 마산전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국방부의 6·25전사마저 간단하게 서술하고 그것마저 이곳저곳에서 편집한 이야기들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필자는 당시 마산전투의 주력부대인 미 25보병사단의 1일 전투일지 700쪽을 미국 서류저장처로부터 받아 번역하고 책자 ‘마산방어전투’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이 사실들은 전 시민으로 번져갔으며 때를 같이하여 격전지에 전쟁기념관 건립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창원시와 마산지역 국회의원들은 기념관 건립에 필요한 국비와 지방비를 확보했다.

2025년 드디어 부지를 확보하고 설계를 완료했으며, 2026년 초 삽을 뜨게 되었다. 창원특레시의 전쟁기념관 건립은 우리나라의 6·25전쟁기념관의 마지막 사업이 될 것이며, 길이 빛날 것이다. 마산방어전투는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을 지킨 전투였다. 부산돌출부 전선 중 마산전선은 유일하게 부산과는 1시간 거리이며, 미 25보병사단은 죽음(Stand or Die)으로 마산을 지켰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은 안전했다.

현재 창원특례시에는 사단법인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마산전투기념관 준공 때 전시할 전투 흔적들을 숱하게 발굴했으며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글 박준혁 월간경남 기자
사진 박준혁·미 25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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