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만나는 인문학] 시간의 점을 찍어 길을 잇다
오후의 여행에 스민 생각 : 여행에서 만난 인문학 37화
2025년 12월 31일로 넷플릭스 서비스가 종료되는 드라마 리스트가 SNS에 올라왔다. 미루어두었던 드라마를 봐야 한다. 숙제도 아니고,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도 아닌, 드라마다.
언제든 볼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작품이 더 이상 ‘언제든’이 아니게 되었다. 미루었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바빠서도, 흥미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저 언제든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늘 이렇게 뒤늦게 나의 뒤통수를 친다. ‘아직 괜찮아.’, ‘언제든 가능해.’라는 막연한 여유를 부리다가, ‘가능성’의 문이 닫히는 순간에야 비로소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가능성의 시간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이제는 ‘재생’ 버튼을 눌러야 한다.
미루어두었던 드라마, ‘미생’을 부지런히 보았다. 마치 완생을 꿈꾸는 사람이 하루하루 미생의 삶을 살아가듯.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미생’의 시작과 끝에 이 대사가 반복된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걷고 뛰어도 제자리인 러닝머신을 길이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대사를 곱씹다 보니,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문장 하나가 겹쳐 떠오른다.
‘길이 있기에 시간이 있는 겐가.’
모든 것은 흐른다
‘나아가는 것’은 공간의 이동인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니, 흐르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을까?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산도, 오래된 건물도, 우리의 몸도 조용하고 확실하게 흘러간다.
강물은 메말라 바닥을 드러낼지언정, 바다를 향한 흐름을 멈추지 않고, 동해 물과 백두산은 억겁의 세월 속에 마르고 닳아 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일 터다.
도처에서 시간의 흔적을 발견한다. 오래 앉아 조금씩 꺼져 있는 의자의 쿠션, 익어가는 김장, 그리고 눈가의 주름에서.
시간은 끝없이 이어지는 선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듯,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공간은 존재감을 잃는다. 움직이지 않아 녹슨 기차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고, 하늘을 나는 새는 날갯짓을 멈추는 순간 추락하기 시작한다. 흐름 밖으로 밀려난 시간의 흔적은 그래서 아프다.
시간은 점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선이다. 고백하건대 나의 약점은 시간을 ‘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시간을 점으로 인식한 채 과거의 시간에 살고 있다가 시계를 보는 순간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흐르는 강물은 보지 못하고, 바가지로 떠낸 한 움큼의 물만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다.
나는 멈춰 서 있지만 세상은 흘러가고, 얼어버린 강 아래 여전히 물은 흐르고 있다. 흐름을 외면한 채 시간의 점 위에 서 있던 나는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넷플릭스의 종료 예고는 단순히 드라마 리스트의 삭제가 아니라, 내 삶의 ‘재생’ 버튼을 누르라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드라마 ‘미생’을 미루어두었던 것은 시간 관리에 서툰 나에게 무의식이 보내는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완생에 닿지 못하더라도, 혹은 내가 가는 이 길이 여전히 막막할지라도 일단은 흐름 속에 발을 담가야 한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기에.
길은 목적지가 아니라 궤적
33년 전, 선배와 떠난 춘천 여행에서 무작정 고(故) 이외수 작가의 댁을 찾아간 적이 있다. 공중전화 부스에 있는 사전 두께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이외수’라는 이름의 전화번호로 전화했었다. 사전 약속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 낯선 독자에게 작가님께서 붓글씨를 선물해 주셨다.
‘길이 있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
고작 스물두 살이었던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오소소 소름이 돋았었다.
나의 길은 내가 만들겠다는 비장한 다짐까지는 아니었지만,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뒷모습을 닮은 ‘道’라는 글자를 보며 막연히 나그네를 꿈꾸었었다.
<미생>의 장그래가 아무것도 없는 바둑판 위에서 자신만의 수를 두며 길을 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멈추지 않고 다음 수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긴다는 말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다.
길은 목적지가 아니라, 내가 내디딘 발자국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지는 궤적이기 때문이다.
멈춰 있는 이동
비록 나그네의 삶을 살지는 못했으나, 아주 가끔 한시적인 나그네의 시간을 보낸 적은 있다. 당시 나는 지도 위에 그어진 길을 따라 그저 묵묵히 발을 내디뎠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몇 분 만에 스쳐 지나갔을 그 짧은 구간은 발에 잡힌 물집과 눈썹 끝에 맺힌 서리로 입체적인 공간으로 변했다. 두 발로 마주한 길 위의 풍경은 잊히지 않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시 경계, 도 경계를 넘어갈 때의 짜릿함은 여전히 내 안에서 팔딱거린다.
매일 자동차라는 기계에 몸을 싣고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한다. 자동차는 시속 100km로 나아가지만, 그 안의 ‘나’는 정작 정지해 있다. 엔진의 동력에 기대어 공간을 이동하는 것을 ‘내가 나아가는 것’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동차는 나를 목적지까지 빠르게 데려다 줄 순 있지만, 길 위의 시간을 가르쳐주지는 못한다. 나의 삶이 타인의 속도에 편승해 ‘멈춰 있는 이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정직한 ‘한 걸음’
진정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비록 느릴지라도 내 근육에 힘을 주며 지면을 박차고 나가는 행위여야 한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은 ‘천 리’라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정직한 ‘한 걸음’에 방점이 찍혀야 마땅하다.
길이란 멈춰 선 자에게는 결코 그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리 완벽한 지도를 쥐고 있어도 문밖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그 지도는 종이 뭉치에 불과하다. 한 걸음을 떼는 순간, 정지해 있던 시간의 점은 비로소 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며, 길은 길로써 존재하게 된다.
넷플릭스의 종료 카운트다운은 나를 재촉하지만, 이제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2025년의 마지막 날, 리스트에서 사라질 드라마를 배웅하며, 나만의 길 위에서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오늘 밤에도 하늘의 별은 수천만 광년을 날아와 기어코 내 눈앞에서 빛나고야 만다.
글·사진 강주혜 작가
강주혜
· 첨단인지브레인센터 원장
· 그림직한 그림가게 대표
· 칼럼니스트
·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