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효선의 씨네아트] 히어(HERE)

같은 공간 다른 순간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

2025-03-20     월간경남

드라마 | 미국 | 104분 | 2025.2.19. 개봉 | 12세 이상 관람가
원작 | 리차드 맥과이어의 그래픽 노블 ‘히어’     각본 | 에릭 로스     감독 | 로버트 저메스키 
출연 | 톰 행크스, 로빈 라이트, 폴 베타니, 켈리 라일리     수입·배급 | ㈜이놀미디어, 메가박스중앙(주)

 

줄거리

하나의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삶의 대서사시. 삶이 남긴 흔적과 아름다움. ‘리처드’(톰 행크스)와 ‘마가렛’(로빈 라이트)의 가족을 중심으로 같은 공간에서 다른 순간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시간을 초월해 겹쳐진다.

 

시간을 품은 공간

우리의 가슴 속 영원한 고전 ‘포레스트 검프’의 드림팀, 감독, 배우, 각본가가 ‘포레스트 검프’ 제작 후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뭉쳐 ‘히어’를 탄생시켰다. 
드림팀의 이번 작품 ‘히어’는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동명의 그래픽 노블(만화책의 한 형태)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로 마치 그들의 30년을 축소하였음을 전하는 느낌이다.

 

그곳(‘히어’)의 영원성

영화는 지구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바로 그 공간에서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교차하며 반복되어 전개된다. ‘히어’의 이전과 지금에 이르는 그 사이의 그 자리, 그 공간에서 세대 교차, 전쟁의 상처, 결혼식, 출산,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이 반복해서 진행되었고, 한 가족의 삶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지금에 이른다. 바로 이 공간, ‘여기’에서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았고 또 지금을 살고 있다.

 

공간이 품은 역사

전쟁으로 인해 청력을 잃은 한 군인의 가족이 전쟁이 끝나고 그 집에 들어가 살면서 점점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간다. 이 공간에서 사는 가족들은 저마다 꿈을 가지고 있으나 그저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경리가 꿈이었던 로즈, 변호사가 꿈이었던 마거릿, 적성에 맞지 않는 영업사원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알, 그림을 포기하며 가족을 위해 일하는 리차드 등. 이들은 그 시대를 사는 가장 보통 가정의 구성원들이다. 그리고 오래된 집이지만 이 집의 건물이 있기 전에도 사람들이 산 흔적이 있고 이 보통의 집이 바로 유적지가 되기도 한다.

 

한 앵글, 앵글 고정 영화

시간을 품은 이 공간에 대한 묘사 또한 흥미롭다. 영화는 원작에서 내용뿐만 아니라 그래픽 노블 형식을 애써 빌어온다. 마치 사진첩을 넘기듯 한 공간(거실)에서 일어난 많은 장면들이 프레임으로 중첩되기도 강조되기도 하면서 시간적 입체감을 연출한다. 특히 같은 각도에서 바라본 한 공간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동일한 앵글의 카메라와 중첩되는 프레임을 통해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시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프레임 안에서 교차하며 이어지는 연출을 통해 단순한 기술적 장치를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남겨진 추억과 흔적을 되새기게 만든다.

 

사람이 사는 여기

영화에서는 세월이 흘러가고 점점 도구나 기술의 발달로 형태가 다르긴 하나 어느 시대이건 사람 사는 형식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삶이 묘사되지만, 인간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전 시대나 후 세대가 크게 다르지 않듯이 지구 저편과 이편의 삶의 방식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음을 말해준다. 앞 시대에는 꿈으로 미련으로 남은 것이 후 시대에서는 성취를 이루고 있는 듯하나, 후 세대에겐 또 다른 미련과 꿈을 낳을 뿐 인간사가 욕망이 제대로 채워진 적이 있던가.

 

새로운 것이 항상 발전했을 것이란 착각

영화는 어쩌면 인간의 내달리는 욕구를 잠시 멈칫하게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인간이 불을 발견한 이후 끊임없는 변화와 그 변화를 추종하며 항상 새로운 것이 우월하고 또, 보다 현재에 가까운 것이 우위를 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에서 시간을 쌓은 전통성이 근대성과 현대성과의 갈등을 빚어내고 또 여기보다는 더 멀리 있는 것이 더 나은 것이란 생각들도 ‘히어’에서는 잠깐 고민하게 한다.

 

공간이 시간을 저장

특히 변화의 시간을 잘라서 보고 우리의 기억 속에 여러 순간들이 겹쳐진 한 공간에서 산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역사를 관통하며 존재하였으며 여러 환경의 변화와 내면의 변화가 입체적으로 연결되는 공간에서 기억과 감정을 품고 있는 시간들을 저장해 가는 존재들로써 어느 누구의 삶도 결코 가벼운 삶은 없음을 말해준다. 이는 시간은 흘러가지만, 기억은 층층이 퇴적되어 감을 묘사하기 위한 매우 적절한 시도일 것이다.

하효선

하효선
· 창원국제민주영화제 집행위원장
· 수석 프로그래머
· 씨네아트리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