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에 배낭 메고 떠난 남미 가족 여행 30화·끝
빈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
갈 곳이 없다
‘PARE!’
모든 길이 ‘pare!(stop)’를 외치며 우리를 막아선다. 갈 곳이 없다. 아르헨티나 국립공원 폐쇄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린다 비스타 사장님과 우리는 그래도 들어갈 방법이 있지 않겠냐며 포기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찔러본다. 모레노 빙하로 들어가는 뒷문 격인 작은 출입구 앞에서 돌아선다. 가이드를 겸한 운전기사는 먼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모레노 빙하’라고 말한다.
연한 잇몸 위로 보일 듯 말 듯 하는 갓난아이의 젖니처럼 하얀 선이 보인다. 카메라를 당겨 보니 해상도가 떨어져 도저히 빙하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다. 엘 찰텐의 피츠로이도 막혔다. 텐트와 침낭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여행이 공중에서 분해되는 느낌이다. 국립공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유명 여행지를 반드시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고 싶어 하던 곳이 국립공원 안에 있는 탓에 여행에 제동이 걸리는 기분이다.
빈 들판에 뻗은 외길이 지평선 위에 점 하나를 찍는다. 종이 위에 그어진 소실점이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에 자연이 그린 소실점이다. 소실점을 향해 뻗은 길 위의 하얀 들꽃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린다. 그 길을 따라 내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빈 들판, 길, 바람, 들꽃 그리고 내 아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한 앵글에 다 들어있다. 어린이날 받고 싶었던 종합선물 세트 같은 풍경이다. 모레노 빙하가 지금 저 풍경보다 좋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나를 위로해 본다. 할 수 없는 것에 애달파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며 길을 나선다.
빙하를 포기하고 말을 타다
모레노 빙하와 피츠로이만 보고 달려왔던 엘 칼라파테에서, 갈 곳을 잃은 우리에게 린다 비스타 사장님께서 초원에서 말을 타보는 것은 어떻겠냐며 권하신다. 초원에서 말타기라니!
가우초(gaucho) 목장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기다리며 창밖을 본다.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거친 들판이 여유롭다. 현재 상황을 잠시 잊게 된다. 그들의 목장에서 키운 소로 만든 스테이크보다 테이블 위의 냅킨꽂이에 눈이 꽂힌다. 모레노 빙하 형상의 냅킨꽂이다.
우리의 노력이 미치지 않는 일은 깨끗이 잊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으나, 미련하게도 미련이 남는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는 말이 공허하다. 우울해지지 말자. 소 한 덩어리 크게 먹고 기운을 차려보자!
가우초 가족들은 각자의 말이 있나 보다.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자신들의 말을 안고 입을 맞추고 등을 쓰다듬는다. 갈기가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 사랑받고 있는 증거 같다. 민주와 나의 말은 갈기가 길어 끝이 살짝 엉켜있다. 민주와 나를 위해 가우초 가족 모두 말을 타고 초원으로 간다.
가우초들은 자신들의 말에 올라탄 후 엎드리는 자세로 말을 껴안고 두 팔로 말의 목과 배 언저리를 토닥거려준다. 표정이 평화로워 보인다. 세 돌 정도 된 아이를 안은 아빠 가우초는 한 손으로 말 고삐를 잡고 장난을 친다. 말과 아이와 아빠가 다 함께 노는 모습이 익숙하다.
아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진다. 민주 또래의 아이도 말을 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저들에게 말타기는 신발을 신고 걷는 것만큼 쉽고 편해 보인다.
말이 왜 달리지 않을까
여행 중에 여러 번 말을 탄 덕분에 우리도 제법 익숙하다. 한 손으로 말 고삐를 잡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동영상 촬영도 가능하다. 뒤처진 민주는 자신과 보조를 맞추어 주는 가우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멀리서 보니 제법 진지한 모습이다. 저렇게 대화를 길게 할 정도의 실력이 아닌데. 민주의 얼굴이 뾰로통하다.
발에 힘을 주고 세게 박차를 가해도 말이 천천히 간다고 화가 단단히 났다. 자기 또래의 아이가 말을 타고 신나게 달리는 모습에 경도되어 자신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보다. 더군다나 말을 타고 산을 오른 경험이 있는 터라 ‘평지쯤이야’란 자신감도 한몫했으리라.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을 탄 가우초의 후손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가우초들의 말타기 솜씨야 숙련이 되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민주가 세게 박차를 가해도 말은 왜 꿈쩍도 하지 않는 걸까? 민주가 탄 말은 아주 천천히 자신만의 페이스로 가고 있다. 말은 민주의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다. 다른 말들은 앞으로 쭉쭉 나가고, 초원을 누비며 달리는데, 자신의 말은 빨리 가지도 않고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니 어린 마음에 화가 날 법도 하다.
말에게는 육감이 있다고 한다. 말은, 자신의 등에 탄 사람의 말 타는 실력을 느낌으로 안다고 한다. 아이는 초원을 달릴 준비가 되었다며 서두르나 말의 입장에서 아이는 준비가 덜 된 상태다. 말은 아이가 자신의 등에 올라타는 순간 어느 정도의 속도로 가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으리라. 더군다나 자신과 충분히 교감도 하지 않은 아이의 지시를 따르고 싶지도 않았을 테지.
되찾은 웃음
말을 타고 바람 속을 달리고 싶었던 아이는 말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마음이 상했는지 표정이 어둡다. 우울한 표정의 아이는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자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우아한 발레 동작을 흉내 내며 천천히 돌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속도가 빨라진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아이의 머리카락은 초원을 달리는 말 갈기처럼 휘날리고 있다. 깔깔거리며 소리를 내 웃고 있다. 어떤 포인트에서 아이의 기분이 바뀌었을까? 난데없이 왜 큰 소리로 웃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여행은 중국에서 불어오는 코로나바이러스에 휘청거리더니 갑자기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며 웃는 아이처럼 현재 상황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흘러갈 수 있으면 나도 웃을 수 있으려나?
아이는 말을 타고 바람 속을 달리지는 못했지만, 빙글빙글 돌며 스스로 말이 되어 바람 속을 달리고 있다. 아이는 자신을 믿지 못한 말에게 보란 듯이 웃으며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아이가 웃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이가 말을 타지 않고 바람 속을 스스로 달려가듯이 하자. 우리가 여행에서 일상을 살았듯, 일상에서 여행을 즐길 수 있다면 나도 아이처럼 소리 내 웃을 수 있으리라!
우리의 여행은 END가 아니라 AND이기에.
EPILOGUE
우리의 여행은, 마치 컴퓨터로 서류 작업을 한창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전기 코드를 뽑아버리듯, 그렇게 끝이 났다. 서류를 마무리한 뒤, 저장 버튼을 누르고, 문서 창을 닫고, 시스템 종료를 해야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무시된 채 전기 코드가 뽑힌 것이다.
우리는 ‘남미탈출기’란 제목을 붙여도 될 정도의 재난영화 한 편을 찍으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재난영화를 찍으며 총 27장의 항공권을 구매했으며, 그중 9장의 표를 사용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18장의 항공권은 버린 표 6장, 환불 표 3장, 미환불 표 9장이다.
ㆍ글 강주혜
ㆍ사진 김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