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에 배낭 메고 떠난 남미 가족 여행 28화
17,798km 떨어진 곳에서 나를 끌어당긴 힘! 칠레 푼타아레나스
검역견이 우릴 먼저 맞이했다
“Muy Bien, Muy Bien!”
개가 짐에 코를 박고 킁킁거릴 때마다 총을 찬 검역관은 만족한 얼굴로 ‘Muy Bien(매우 잘했어)’을 외친다. 개가 뒤적거린 짐은 검역관이 따로 짐 검사를 한다. 마약견이 아니라 농산물을 찾는 개다. 농산물은 칠레 입국 시 금지 물품이다. 우리도 먹다 남은 바나나를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휴게소 쓰레기통에 버렸다. 칠레 입국 소에 도착하니 검역관이 개를 데리고 버스에 탄다. 개는 버스 안의 좁은 통로를 다니며 승객들 쪽으로 기웃거리며 킁킁거린다. 개의 1차 검역이 끝난 후 우리는 화물칸에서 각자의 짐을 꺼내 들고 검역소 사무실로 간다. 각자의 짐을 바닥에 놓고 짐 뒤에 서서 기다린다. 타원형으로 짐들이 놓여 있고 짐 뒤에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다. 거리공연이라도 구경하는 기분이다. 검역견의 등장은 긴장이 아니라 여행자들에게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민주는 검역견과 사진 한 컷을 찍고 좋아한다. 10시간이면 도착할 거리가 12시간이 걸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메리카대륙의 땅끝 ‘푼타아레나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버스의 시동은 꺼져있고 띄엄띄엄 빈자리가 많다. 남편과 아이를 찾아 버스에서 내린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다르다. 주위는 우유를 부어놓은 듯 뿌옇다. 불어오는 바람에 안개가 흩어지며 풍경이 보였다 사라진다. 바다다.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아직 내리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낮과 밤의 경계도 허물어버렸나 보다. 어디가 바다고 어디가 하늘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푼타아레나스는 칠레 땅이지만 남부 해안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육로로 갈 수 없는 곳이다. 칠레의 다른 지역에서 육로를 통해 푼타아레나스로 오려면 아르헨티나 영토를 지나거나 비행기 또는 배를 타야 한다. 우수아이아는 세계 가장 남쪽에 있는 세상 끝 마을이고, 푼타아레나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땅끝마을이다. 우리나라로 이야기하자면, 우수아이아는 마라도, 푼타아레나스는 해남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구글 지도를 보니, 바다 위에 파란 점이 깜빡이고 있다. 우리는 지금 마젤란 해협을 건너고 있다. 배가 크긴 한가 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데 배의 움직임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새벽에 전해진 국경 폐쇄 소식
어둡기 전에 숙소로 가야 한다. 우산을 쓸 정도의 비가 아니기에 모자를 눌러쓴 채 푼타아레나스의 숙소로 향한다. 앞뒤로 배낭을 메고 앞서가는 아이를 보니, 여행하는 동안에 자란 것이 느껴진다. 여행하면서 자신의 짐은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고 있는 아이다. ‘민주야 비단 여행뿐이겠니, 네 인생의 짐도 네가 짊어져야 하는 거란다.’
‘카톡 카톡’
“누나, 누나, 웨이크업!!!”
새벽 2시 37분이다. 12시간 버스를 타고 온 탓에 곯아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카톡 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나 보다. 화들짝 놀라며 잠이 달아난다. 한국에 있는 나의 여행 멘토 동생의 메시지이다. 신혼여행으로 세계여행을 다녀온 뒤 부인은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본인은 여행사를 다니면서 <세계여행플랜북>이란 책까지 쓴 여행전문가다. 이 시간에 나를 깨울 정도면 급한 일이 있나 보다.
“누나,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국경을 폐쇄한대요!”
잠은 이미 저만치 달아났고, 결말이 보이는 불안이 바싹 다가온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란다. 남미 여행 단톡방은 마치 불난 호떡집처럼 연신 카톡이 울린다. 저마다 알고 있는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아르헨티나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모레노 빙하와 파타고니아의 정수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푼타아레나스를 떠날 수는 없다. 민주는 우수아이아에서 미룬 ‘숙제’ 펭귄을 만나야 했고, 나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짧아진 여행 일정에 힘이 빠진다
심란한 아침이다. 저렴한 숙소라 조식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조식 장소가 숙소를 벗어난 뒷골목에 따로 있다니 약간 당황스럽다. 식당인 줄 알고 들어가니 일반 가정집이다. 좁은 거실의 소파에 갓난아기가 누워있다. 주방에서 아기 엄마로 짐작되는 젊은 여자가 우리를 보며 멋쩍은 미소를 보낸다. 조식이 준비되는 동안 자연스레 아기 곁에 앉아 아기를 본다. 검은 피부의 갓난아기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아기를 어르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 나를 쳐다보는 아기의 눈이 꼬여버린 일정으로 심란한 마음을 무색하게 만든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한다. 방수 재킷을 우비 삼아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한다. 마젤란 해협을 향해 서 있는 동상이 눈에 띈다. 마젤란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한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사! 마젤란의 발을 만지면 이곳으로 다시 올 수 있다는 말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만진다. 마젤란의 발 부분만 색이 다른 이유를 알 것 같다.
내일 새벽 막달레나 섬 펭귄 투어 예약을 하고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표 예매를 한다. 4박을 예약한 호텔에서 2박만 묵고 떠나기로 한 뒤, 반 토막이 나버린 푼타아레나스의 시간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며 비가 흩날리는 거리로 나선다. 날씨 탓인지, 아르헨티나 국경 폐쇄 소식 때문인지 발걸음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쇼윈도 대신 종이박스를 테이프로 붙여놓은 구둣가게, 셔터를 반쯤 내린 채 손님을 기다리는 점원, 검은 페인트칠이 된 상점의 문 위에 갈기듯 쓰인 낙서들은 흡사 전쟁을 치른 모습이다. 최루탄 가스 냄새가 바람결에 느껴지는 푼타아레나스가 을씨년스럽다.
펭귄, 사람과 다를 것이 있을까
부산에서 왔다는 초밥집 젊은 사장님은 몇 년 전만 해도 3월에는 비가 아니라 눈이 내렸다고 한다. 페루의 비니쿤카도 만년설이 녹으면서 드러난 산이었다. 지구온난화가 피부로 와 닿는다. 펭귄을 만나는 날인데,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투어가 취소된다고 하기에, 시간이 없는 우리는 내심 걱정했었다.
막달레나 섬의 주인인 펭귄들은 섬 가운데 우뚝 솟은 언덕에 굴을 파고 살고 있다. 펭귄들이 사는 마을을 보고 있으니 사람과 다를 게 뭘까라는 생각이 든다. 뒷짐 지고 걸어가는 할아버지 펭귄도 보이고, 솜털이 빠지지 않은 새끼 펭귄의 털을 고르고 있는 엄마 펭귄,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듯 나란히 걸어가는 펭귄.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펭귄은 귀여워도 너무 귀엽다. 코로나19도 아르헨티나 폐쇄도 잊게 할 정도로 귀여운 펭귄이다. Gracias, Pingüino!
“너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거니?”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빗줄기가 굵어진다. 방수 재킷 모자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저기 있구나!’ 발걸음이 빨라진다. 12,798km 떨어진 곳에 있는 나를 끌어당긴 중력이 저기에 있다. 서로를 끌어당긴 힘이 드디어 나를 이곳에 서게 했구나! 비가 와서 다행이다.
집과 집 사이 좁은 틈에 비집고 들어간 듯 서 있는 이정표가 찍힌 사진을 보는 순간 울컥 감정이 북받쳤던 기억이 난다. ‘나 저곳에 꼭 가야겠어!’
이정표에 빼곡하게 붙은 화살표들은 자신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얼마를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동서남북으로 뻗은 화살표가 나를 가리키며 묻는다.
‘너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거니?’
‘어디든 상관 없어, 난 멀리 가고 싶어. 아주 아주 멀리 가고 싶어!’
‘그래서 네가 여기에 왔구나!’
ㆍ글 강주혜
ㆍ사진 김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