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에 배낭 메고 떠난 남미 가족 여행 24화
여행에서 일상을, 다시 여행을. 파라과이·아르헨티나
해발 3,600m→43m 내려 온 감격 “Muchas gracias!”
해발 3,600m에서 해발 43m로 내려온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코로만 숨을 쉬어도 괜찮다. 뛰어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고도가 높아지면 산소가 희박해진다는 것을 책에서 배웠다. 산소가 부족하면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도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증상들이 몸으로 나타났을 때 비로소 난,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몸의 통증을 줄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도를 몸으로 체감하자 우리나라의 고도도 궁금하다. 찾아보니 약 448m다. 고도의 고통을 겪은 우리는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파라과이 아순시온으로 왔다고 말하기보다 해발 3,600m에서 43m로 내려왔다고 말하고 싶다.
아순시온 공항 출국장으로 나오니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동영상을 찍는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리꼬님이다. 고도가 낮아져 숨쉬기 편한 것만으로도 좋은데, 낯선 타국에서 우리를 반기는 얼굴이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남미 여행을 시작한 지 3개월이 다 되어 간다. 우리는 지쳤고, 쉬고 싶다. 쉬고 싶은 시기에 여행 동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에 리꼬님이 계신 파라과이라니, Muchas gracias!(정말 감사합니다!)
리꼬님 부부는 파라과이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던 선친의 유업을 잇기 위해 한국에서의 일을 접고 파라과이로 오신 용기 있고 당찬 한국의 젊은 부부다.
남미여행자들이 파라과이를 여행 루트에 넣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내로라하는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파라과이가 삼국동맹전쟁(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삼국동맹과 파라과이 간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면, 전 세계인들은 이구아수 폭포를 보기 위해 파라과이로 몰려왔을 것이다. 이 전쟁의 패배로 파라과이는 이구아수 폭포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게 빼앗기고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을 잃었다. 이 비운의 역사를 이곳에 와서 알게 되니, 파라과이를 껴안으며 토닥토닥 위로해 주고 싶다.
남미 국가 중 첫 한인 이민 허용한 파라과이
파라과이는 처음으로 한인 이민을 허용한 남미 국가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한국어로 된 간판이 많이 보인다. 한식당도 종류별로 다양하고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음식 값도 저렴하다. 남미 여행 중 한국음식이 그리워 파라과이를 찾는 장기 여행자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참기름 짜는 방앗간까지 있다는 말만 들어도 한국 음식의 클래스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리라.
아순시온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하자 중학생 정도의 남매를 대동한 젊은 부부가 우리에게 환영 인사를 한다. 젊고 아름답기까지 한 부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편의 양쪽 입 꼬리 근처에 자신의 입 꼬리 부분을 번갈아 갖다 대며 볼 뽀뽀를 한다. 남편은 당황한 표정을 급하게 감추고 어색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한다. “Hola!”
이들 가족의 에어비앤비 첫 손님이 우리 가족이라며, 우리보다 더 들뜨고 설렌 표정을 짓고 있다. 주인아저씨는 숙소의 이름이 딸의 이름이라 말하며 뿌듯해 한다. 파라과이 전체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느낌이다. 당연히 숙소도 깨끗하다.
우리가 파라과이에 머무는 동안 매일 한 끼는 한식을 대접하리라 마음을 먹었다는 리꼬님은 삼겹살과 일주일 전에 지나간 나의 생일 밥상을 차려낸다. 한국에서 고작 세 번 정도 얼굴을 본 사이인데 마치 피붙이 대하듯 챙겨주신다. 눈물 나게 고맙다.
람바레 언덕서 바라 본 숲과 어울린 도시 ‘아순시온’
아순시온에 손님이 오면 데려간다는 ‘람바레 언덕(Cerro Lambaré)’에 오르니 아순시온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순시온 전경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서서히 감동이 밀려온다. 한 나라의 수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숲을 품고 있는 도시가 아니라, 도시를 품고 있는 숲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거대한 숲속에 단층의 나지막한 집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누가 파라과이에 볼 것이 없다고 했나. 우거진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저 햇살만으로 충분히 반할 만한 곳이다.
아순시온은 지반이 약해 높은 건물을 지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나지막한 집들이 가난의 상징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아순시온에 사는 사람처럼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쇼핑을 한다. 멕시코시티에서 영화 ‘겨울왕국Ⅱ’ 홍보 광고를 보고 아쉬워하던 민주를 위해 오늘은 영화를 보러 간다. 영화를 보기 위해 온 백화점이 특이하다. 나무와 건물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고, 백화점 옆으로 졸졸졸 얕은 물이 흐르고 있다. 도시를 품고 있는 숲이 확실하다. 영화관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포스터가 눈에 띈다.
며칠 쉬다 브라질로 갈 계획이라는 말에, 리꼬님께서 큰 짐은 여기에 두고 가벼운 짐으로 브라질과 이구아수 폭포를 보고 온 뒤 아순시온에서 아르헨티나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신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가벼운 짐이라는 말이 너무나 유혹적으로 들린다. 기꺼이 그 유혹에 빠지기로!
“남미 장물 다 모인다” 3개 국가 접경지 ‘시우다드델에스테’
아르헨티나의 푸에르토 이구아수에서 파라과이 시우다드델에스테로 가는 버스는 브라질을 경유한다. 3개국을 왕래하며 오가는 버스는 마치 우리네 시골 장날 완행버스 같다. 사람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다. 복잡한 버스 안에서도 ‘떼레레’를 즐기는 이들이 있다. ‘떼레레’는 마테차를 즐기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나무로 만든 컵에 쇠로 만든 빨대를 꽂은 채 차를 빨아 마시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빨대를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사용하는 것이다. 파라과이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떼레레’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즐긴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파라과이 입국 사무소를 그냥 지나친다. 불법 입국자가 되지 않기 위해 시우다드델에스테 정류소에서 다시 입국사무소까지 걸어간다. 짐은 가볍지만 한낮의 햇빛은 아순시온에 두고 온 무거운 짐만큼 우리를 지치게 한다.
시우다드델에스테는 파라과이 대통령이 타는 차도 아마 이곳에서 사온 장물일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남미의 장물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장물이 많다 보니 물건 값이 싸다. 아르헨티나에서 텔레비전을 사기 위해 이곳까지 와도 차비가 남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3국이 접한 국경도시의 진면목은 가게의 금고에서 드러난다. 이곳에서는 4개국의 돈이 통용되고 있다. 과라니(파라과이), 헤알(브라질), 페소(아르헨티나) 그리고 달러(미국). 이곳에서 어느 나라로 가느냐에 따라 받아가는 거스름돈이 달라진다. 환전 수수료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여유 돈이 있다면 다음에 갈 나라의 돈으로 환전을 하는 것도 괜찮다.
시우다드델에스테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댐이 있다. 이타이푸 댐(Itaipu Dam)은 브라질과 파라과이가 공동으로 건설한 댐으로 전력량이 우리나라 소양강댐의 63배라고 한다. 이타이푸 댐의 발전량은 전체 브라질 전력 수요의 25%, 파라과이 전체 수요의 80%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엄청난 전력량에도 불구하고 왜 아순시온에서는 정전이 그렇게 자주 되는 걸까 갑자기 궁금하다.
이곳에서 아순시온까지는 버스로 5시간 정도밖에 안 걸린다. 5시간의 거리가 짧게 느껴지는 걸 보니 우리가 남미의 시간과 거리에 익숙해지고 있나 보다. 더군다나 오늘은 운이 좋게도 버스 2층의 맨 앞좌석이다.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올 빈 들판을 생각하니 벌써 설렌다. 빈 들판은 남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풍경 중 하나이다.
파라과이 일상에서 만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브라질 여행에서 돌아온 민주는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파라과이 학교의 학생이 되어 등교를 한다. 리꼬님의 제안으로 성사된 파라과이 학교 체험은 민주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또 다른 여행의 재미가 되고 있다.
아순시온에서 일상을 살아야지 하고 길을 나서지만 여행 모자에 등산화, 옷차림이 여행자다. 한인 식당에 가니 이곳에 뭐 볼게 있어 왔냐고 묻는다. 어른들은 일을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할 시간에 어른과 아이가 함께 어딘가를 기웃거리는 것이 일상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비슷한 일들을 한다. 아침이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친 얼굴로 출근을 하는 어른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자로서의 일상을 즐기는 우리는 그들에게 이방인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민주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하루도 그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날씨가 더운 나라이다 보니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등교를 해서 12시가 되기 전에 하교를 한다. 하교 후에는 빙그레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있는 동네 미용실에서 ‘뽕따’와 ‘붕어싸만코’를 사먹는다. 교복을 동네 빨래방에 맡기고 해질 무렵에 찾아온다.
우리가 그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 일등 공신은 ‘교복’이다. 교복을 입은 민주와 함께 다니면 우리는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한편으로 생각하고 우리도 당당해진다. ‘제복’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어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의 주요 상을 휩쓸었다. 파라과이 청년이 우리를 보더니 ‘봉~’이라고 말하며 엄지를 세운다. 내가 상을 받은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아카데미 시상 직후임에도 ‘기생충’ 상영관에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이 상영관 안에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영화의 원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단 두 사람이 우리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내일이면 다시 여행을 떠난다. 여행 짐을 재정비하며 가방 한 개를 비웠다. 100일 넘게 여행을 하다 보니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여행 중에 일상을 즐길 수 있었기에 더 없이 좋은 여행지였던 파라과이는 리꼬님 부부가 있어 특별한 나라로 각인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
파라과이에서의 재충전이 우리를 다시 설레는 여행자로 만들었나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El Ateneo Grand Splendid)는 대형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 만든 서점이다. 별명이 과장된 건 아니다. 서점에 발을 딛는 순간 황홀경에 빠진다. 오페라 극장이었을 때 이곳의 주인공은 무대 위의 배우였겠지만 서점이 된 엘 아테네오의 주인공은 관객들이 앉았을 자리에 꽂혀 있는 책들이다. 단지 책이 꽂혀 있을 뿐인데 이렇게 환상적일 수 있단 말인가!
파라과이에서 느리게 뛰던 심장이 다시 빨라지고 있다. 화려한 엘 아테네오가 우리의 피를 끓어오르게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서 만나는 여행자들이 우리를 향해 동류에게 보내는 눈인사를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여행자로서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Hola, Buenos Aires!
ㆍ글 강주혜
ㆍ사진 김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