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에 배낭 메고 떠난 가족 여행 17화

유카탄 반도의 베이스캠프 ‘플라야 델 카르멘’ 멕시코

2021-11-15     월간경남

아이는 공항에서 사귄 이스라엘 언니와 놀고 있다. 20대 초반의 갈색 머리 어른과 10살의 검은 머리 아이는 머리를 맞대고 공항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려가며 게임을 하고 있다. 비행기 연착이 1시간씩 길어지고 있다. 1시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칸쿤은 점점 멀어져 간다.

 

생일 선물로 불러준 한국어 축하 노래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생일 축하합니다~”
이스라엘 여행자는 친구의 생일 선물로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부른 생일 축하 노래를 선물로 주기로 했다며, 우리 가족에게 한국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배낭여행자들은 배낭을 메고 떠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친근한 미소를 보낸다. 이렇게 비행기가 연착하는 동안에는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되고, 또 우연히 다른 나라에서 다시 만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이스라엘 여행자들과 우리는 비행기가 연착한 5시간 동안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페이스북 친구가 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잃어버린 1시간

자정이 넘어 호텔에 도착한 후 지칠 대로 지쳐 그대로 침대에 쓰러진다.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체크아웃 시간이라며 초인종을 누른다. 비행기로 1시간 20분 동쪽으로 옮겨 왔을 뿐인데 시차가 바뀐 것이다. 잃어버린 1시간이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다.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다.
5시간 연착부터 밀리기 시작한 시간과 1시간의 시차, 렌터카 계약을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 하루를 다 잡아먹은 탓에, 정작 우리는 온종일 한 끼도 못 먹고 있다. 아이는 더위와 배고픔에 지쳐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랜다. 무거운 배낭과 찌는 듯한 날씨, 거기에 배고픔까지. 오늘은 개고생 종합선물 세트를 받은 기분이다. 힘들다. 좋아서 하는 일도 힘든 건 힘든 거다. 이럴 땐 집에 가서 밥 먹고 쉬는 게 최고인데.
가자! 플라야 델 카르멘에 있는 우리 집으로.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 ‘칸쿤’

요즘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칸쿤은 다른 멕시코 지역보다 물가가 비싸다. 배낭여행자들은 칸쿤의 호텔 존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칸쿤만큼 여행 인프라 형성이 잘 돼 있는 플라야 델 카르멘을 선호한다. 칸쿤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플라야 델 카르멘의 에어비앤비를 숙소로 정하고 렌트를 한 이유는 유카탄반도를 여행하기 위해서다.

 

비현실적 풍경 ‘핑크라군’

유카탄반도의 첫 여행지는 핑크라군이다. 이름 그대로 핑크빛 호수다. 핑크라군은 소금을 생산하던 광산으로 염도가 높은 호수이다. 호수에 서식하는 미생물들이 태양 빛을 만나 핑크빛을 띠게 돼 핑크라군이 됐다고 한다. 플라야 델 카르멘에서 차로 3시간 30분 정도 가야 한다. 길을 잃고 헤매다 4시간 만에 도착이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숨이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지만,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분홍빛 호수와 푸른빛 호수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핑크라군 투어의 전부다. 그늘 한 점 없는 곳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듯하다. 쏟아지는 태양빛 때문인지 핑크라군의 풍경은 마치 노출 오버된 사진 같다. 

그늘 한 점 없는 핑크라군. 사진 속에서도 열기가 느껴진다
호수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돼 있다. 물에 들어가고 싶어 쳐다만 보고 있는 아이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칼이다!’란 시가 스쳐 간다.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손조차 댈 수 없는 저 물은 태양 빛을 받아 칼이 돼 눈을 찌른다. 눈을 찌른 그 칼은 다시 푸른 물을 베어버린다. 베인 상처 사이로 분홍빛 피가 흐른다.
50년을 사는 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바다와 호수는 푸르다’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푸른 물이 아니라 분홍 물도 있다는 것을. 내가 왕복 7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 이곳에 온 이유이다.

분홍빛 호수와 푸른빛 호수 사잇길

핑크라군에서 2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7~13세기 후반의 대도시 유적지인 치첸이트사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지 않는다. 멕시코시티에서 테오티와칸을 다녀온 이유도 있으나, 무엇보다 그곳을 가게 되면, 야간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멕시코 고속도로에는 조명이 없어 위험하다.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며 세운 원칙 중 하나는, ‘남이 간다고 다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욕심내지 말자’이다. 세상에 좋은 곳은 너무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곳을 다 갈 수는 없다. 쫓기듯, 숙제하듯 하는 여행은 하지 말자!

 

주위 풍광, 날씨와 너무 잘 어울린다
햇빛이 강렬하기에 선글라스와 모자는 필수다

 

절벽 위 마야 유적지 ‘뚤룸’

뚤룸은 카리브해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위치한 마야유적지다. 나무 그늘이 시원한 길을 걷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시야가 탁 트이며 넓어진다. 높이 3~5m의 두꺼운 성벽에 둘러싸인 성채 안에는 세 개의 신전이 보인다. 부서지고 무너진 모습임에도 당당한 느낌이다. 멀리서 보이는 바람의 신전은 마치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카리브해를 보고 있는 듯하다. 신전의 빛깔을 보호색으로 한 이구아나들이 곳곳에 보인다. 처음에는 무섭더니, 이젠 이구아나가 지나가도 아무렇지 않다. 마야인들이 사라져 버린 지금은 저들이 이곳의 주인이겠지. 관광객이 모두 떠나버린 한밤의 이곳에서 신전 위에 올라가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을 이구아나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뚤룸 안에는 3개의 신전이 있다고 한다. 저 건물의 이름과 용도는 알 수 없다
무너진 성벽에서도 힘이 느껴진다

바람의 신전이 가까워지자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바람의 신전이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닌가 보다.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한 아이는 말릴 틈도 없이 바다로 가고 있다. 난 위에서 바다를 보고 싶은데, 아이는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 한다.

바다만 보면 들어가고 싶은 아이. 수영복이 없어 발만 적시는 걸로 아쉬움을 달랜다
무너진 유적지 사이를 통과한다. 저 빛을 따라가면 다른 세계가 나올 것 같다

 

‘여행자의 거리’ 플라야 델 카르멘 5번가

마야유적지에 감탄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카리브해를 보는 순간, 마야유적지는 의문의 1패다. 인간이 제아무리 날뛰어도 자연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저 바다 앞에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을 가져와도 이길 수는 없을 듯하다. 
2~3일의 여유를 두고 유카탄반도 여행을 하고 있다. 여행을 가지 않는 날은 빨래하고 장을 본다. 플라야 델 카르멘 5번가에 나가 쇼핑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 또 바다로 통하는 골목길을 만나면 그 골목길을 따라간다.
플라야 델 카르멘 5번가는 여행자의 거리라 불리는 차 없는 거리다. 레스토랑과 카페, 기념품 가게 등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거리에는 예술가와 여행자들로 넘쳐난다. 거리를 걷다 바다로 통하는 골목을 바라보면 그 길 끝에 골목길의 넓이만큼 바다가 보인다. 
카리브해에 발만 담근 아이는 온몸을 바다에 던지고 싶어 한다. 오늘은 카리브해에 온몸을 담가보자며 집을 나선다. 
첫날 본 물빛은 투명했는데, 오늘은 어인 일인지 그 빛깔이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휴양지에 온 여행자 모드 장착이다. 아이와 남편은 바다로 뛰어들고, 난 모래사장에 누워 사람들 구경이나 해야지.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해골들. 사오고 싶었으나 배낭여행 중이라 사진에만 담아왔다
카르멘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나오는 신부와 하객들. 하얀색 성당이 바다와 잘 어울린다

 

유카탄 반도 여행의 베이스캠프

우리에게 플라야 델 카르멘은 유카탄반도 여행의 베이스캠프다. 여행을 가지 않는 날에는 휴식을 취하며 에너지를 충전한다. 한식을 만들어 먹으며 몸의 에너지를 비축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지친 영혼을 달랜다.
낯선 곳을 찾아 떠나온 여행에서 익숙한 것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위로받고자 하는 모순된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행 속에서 다시 여행하기 위해 구축한 베이스캠프는 낯선 곳에서도 안정과 평안을 찾고자 하는 본능 때문일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오늘도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된장으로 찌개를 끓여 먹고, 드라마 도깨비를 보며 행복해한다.
드라마 속 은탁이가 말한다. “신의 한 걸음 한 걸음에는 다 이유가 있겠죠.”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에도 다 이유가 있으리라.

유적지와 어우러진 카리브해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ㆍ글 강주혜
ㆍ사진 김정태